이종찬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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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종찬은 1916년 경성부에서 출생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 한국 전쟁에서 수도경비사령관, 혼성 수도사단장, 제3사단장,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며 활약했다. 4·19 혁명 이후 국방부 장관을 지냈으며, 5·16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고 주 이탈리아 대사,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3년 사망했으며, 친일 행위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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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191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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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종찬 |
한자 표기 | 李鍾賛 |
로마자 표기 | Lee Jong-chan |
출생일 | 1916년 3월 10일 |
사망일 | 1983년 2월 10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중림동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3묘역 1호 |
혼명 | 진정한 군인 |
군사 정보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
군 복무 | 1937년 - 1945년 (일본 육군) 1949년 - 1960년 (한국 육군) |
최종 계급 | [[파일:帝國陸軍の階級―肩章―少佐.svg|35px]] 소좌 (일본 육군) [[파일:18.SKAF-LG.svg|40px]] 중장 (한국 육군) |
지휘 | 일본 제17군 남해지대 독립공병 제15연대 한국 수도사단 한국 제3사단 한국 육군본부 한국 육군대학 |
참전 |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서훈 | 일본 공5급 금치훈장 일본 훈6등 단광욱일장 대한민국 보국훈장 삼일장 |
정치 경력 | |
직책 | 제8대 국방부 장관 |
임기 | 1960년 5월 2일 ~ 1960년 8월 23일 |
전임 | 김정렬 |
후임 | 현석호 |
대통령 | 허정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곽상훈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백낙준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허정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윤보선 대한민국 대통령 |
부통령 | 송요찬 대한민국 부통령 권한대행 서리 |
총리 | 허정 대한민국 내각수반 허정 대한민국 국무총리 김도연 대한민국 국무총리 서리 허정 대한민국 국무총리 장면 대한민국 국무총리 |
차관 | 이희봉 대한민국 국방차관 안춘생 대한민국 국방차관 직무대행 서리 |
기타 직책 | 이탈리아 주재 대사 |
이탈리아 대사 임기 | 1961년 6월 8일 ~ 1967년 9월 8일 |
정당 | 무소속 |
정당 경력 | 민주당 당무위원 민주공화당 상임위원 민주정의당 최고위원 한국국민당 최고위원 한국국민당 전임고문 |
개인 정보 | |
본관 | 경주 |
종교 | 불교 |
배우자 | 표자영 |
자녀 | 이정은 |
친인척 | 이하영(친조부) 이준영(친종조부) |
부모 | 이규원(부), 윤태성(모) |
기타 | |
학력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
웹사이트 | 헌정회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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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종찬은 원칙을 중시하는 군인으로, 성실하고 불의를 싫어하는 장군이었다.[31]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32] 젊은 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하여 항상 신중했지만, 일단 말을 시작하면 수 시간 동안 담화를 나누었다.[19]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조선인들은 대부분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지만, 이종찬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1949년 육군 대령으로 임관한 후,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으나, 친일파 집안 출신으로 일본 군인이 되었다는 것 외에는 젊은 나이로 인해 특별한 처분을 받지 않았다.[11] 1948년 이시영 부통령의 권고로 한국 육군에 입대하였으며, 계급은 대령(군번 15108번)이었다.
1949년 6월 22일 국방부 제1국장으로 발탁되었고, 여순 사건으로 처벌 위기에 놓인 박정희를 구제했다.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을 때, 일사부재리의 원칙과 박정희의 청렴함, 군인으로서의 우수성을 들어 변호하고 보호했다.[11] 1949년 8월 10일 국방부 제1국장에 임명되었고,[13] 11월에는 정훈국장에 임명되었다.[14] 1950년 4월, 국방부 병기행정본부장이 되었다.
1950년 6월 18일,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긴급 소집되었으나 지휘할 수 있는 부대가 부족했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한강 방어선으로 이동, 혼성 수도사단장으로 영등포를 방어했다(한강 전투).
1950년 7월 3일 북한군의 한강 도하로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자, 수도사단은 재편성되었으나 이종찬은 과로로 이준식에게 사단장직을 인계했다. 이후 채병덕의 지휘하에 제9사단 신편에 착수했다. 1950년 8월, 중앙훈련소 본부장,[16] 9월에는 제3사단장에 취임하여 형산강에서 북한군을 저지했다(경주 전투).
인천 상륙 작전과 낙동강 방어 작전 개시 후, 육군 본부는 이종찬을 준장으로 진급시키려 했으나, 이종찬은 국군이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후퇴한 것에 대해 사과하며 계급장을 반납하고 진급을 거절했다.[17] 결국 정일권 참모총장이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어 준장이 되었다.[17]
1950년 11월 30일, 국방부 병기행정본부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3월 17일, 육군종합학교 교장을 거쳐, 1951년 6월 소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후처리, 거창 사건, 부산 정치 파동 등의 재판에 몰두하며,[18] 정부, 한국군, 유엔군 간의 조정을 위해 노력했다.
1952년 1월 12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개헌 시도에 대해, 계엄령 선포에는 응했으나 병력 사용은 군의 정치 개입이라며 거절했다. 이승만은 "60만 대군 중에 내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은 당신뿐이다."라며 격노했다.[19] 5월 25일 비상 계엄령 선포 후, 신태영 국방부 장관과 원용덕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의 병력 동원 요구를 거절하고, 각 부대에 훈령 217호[22]를 발령하여 병력 이동을 막았다.[21]
미 육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은 이종찬에게 공관 출입 자제를 요청하고, 미군 헌병을 파견해 경비를 강화했다.[19] 이승만은 유재흥에게 이종찬 포살을 명했으나, 유재흥의 설득으로 취소되었다.[23]
1952년 7월, 참모총장직을 사임하고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유학했다. 1953년 7월, 육군대학교 총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여 군을 장악하고 민정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12] 백선엽 대장, 유재흥 중장에게 예편을 요구하였다.[23][24] 박정희 소장의 정군론을 듣고 쿠데타를 예견한 이종찬은 군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미국의 국가안보회의와 같은 기구를 설치한다고 발표하였다.[19] 이어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 등 군 수뇌부에 제헌절에 헌법 준수 선언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하였다.[19]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에 협력을 거부하였다.[25] 이후 주이탈리아 대사로 부임하였다가 1967년 사임하였다.
1968년 재향군인회 자문위원을, 1970년 코리아 엔지니어링 사장을, 1972년 한국-이탈리아 협회 회장을, 1973년 신한항업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 2월,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2기)에 당선되었으나 국회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고,[26] 여러 차례 사표를 제출하였다.[27] 같은 해 3월,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78년 1월 국회 안보문제 연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3월, 유럽 각국의 방위산업을 시찰하였다. 같은 해 12월, 제10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3기)에 재선되었다. 1979년 유신정우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김영삼의 제명(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에 반대하였다.[19] 1979년 3월, 성우회 회장[28]에 취임하였다.
전두환의 등장에도 비판적이었으며 12·12 사태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대해 지인에게 "군과 나라의 綱紀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다"고 한탄하였으나, 곧 수사를 받았고,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던 성우회가 해체되었다.[29]
1983년 2월 10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30]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졌고, 보국훈장 통일장이 추서되었다.[8]
2. 1. 생애 초반

1916년 3월, 경성부에서 이규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경상남도 창원군 출생으로 본적지인 경성에서 자랐다고 기록되어 있다.[8] 이하영의 손자로, 조선 귀족 자작 가문 출신이었으나, 작위를 포기하여 화제가 되었다.[2]
경성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를 거쳐 1933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3] 같은 해 4월 육군사관학교(49기)에 입교하였다. 동기로는 채병덕이 있으며, 예과 2년차에 공병과를 선택하였다. 1935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4월부터 9월까지 아이치현 토요하시시에 있는 제3사단 공병대에서 근무하였다. 1937년 6월 육사 49기 공병과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으로 제3사단 공병대에 배속되었다.
1937년 8월 21일, 육군 공병 소위로 임관하였다.[4]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 전선에 파병되었고,[5] 1938년 3월 30일 공병 중위로 진급하였다.[6] 1940년 겨울 중국에서 귀환하였으며, 1941년 3월 대위로 진급하였다. 1942년 제33회 론공행상에서 5등 욱일 6등의 금치훈장을 받았고,[7] 같은 해 육군포병학교에 재학하였다.
이후 선박 공병으로 전과하여 선박 부대 참모로 남방 전선을 전전하였다.[2] 1942년 12월 독립 공병 제4중대에 소속되었고, 1943년 7월부터 제17군 남해지대 소속 독립 공병 제15연대에서 복무하였다.[8] 독립 공병 제15연대 제3중대장으로 근무하며, 동부 뉴기니에 파병되어 오웬스탠리 산맥을 넘어 포트모르즈비 작전 등에 투입되었다. 1943년 10월 전황 악화로 뉴기니 서부로 후퇴한 이후 종전까지 남태평양 일대를 전전하였다. 1943년 12월 1일 소좌로 진급하였고,[9] 1944년 독립 공병 제15연대장 대리를 역임하였다. 마노크와리에서 다나카 타카오 중좌를 중심으로 한 갑기관이 편성되자, 제15연대에서 야나자와 고급군의와 함께 배속되었다. 임무를 마치고 마노크와리 지대 사령부의 한직에 있었다. 종전 당시에는 독립 공병 제15연대 연대 부속이었다.[10]
전후 조선 출신자들로 조 부대가 만들어졌고, 이종찬이 그 부대의 지도자가 되었다. 1946년 5월 14일 조 부대는 마노크와리 항에서 미군이 제공한 귀환 선박에 승선하여 2일 후 할마헤라에 내렸다. 이때 배웅하던 우에키에게 "우에키, 한국에 돌아가도 앞으로가 힘들 것이다. 서로 힘내자"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1946년 8월에 귀국하였다.[8]
2. 1. 1. 출생과 소년기
본관은 경주이다. 1916년 3월 10일 조선귀족회 이사와 부회장을 지낸 이규원의 아들로 경성부 중림동에서 출생하였고 성장하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외무대신, 법부대신을 지냈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에 적극 협력하고 법부 대신으로서 을사조약 체결에 서명한 을사삼흉 이하영의 손자였다.[1]이하영은 재산가이자 장손이었기에 여유있는 가정에서 자랐으며, 1921년 경성부에 근무하는 고위급 일본인 자제들을 위해 세워진 경성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8년 경성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1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했다.[1]
2. 1. 2. 일본 군인 활동
1935년 경성중학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입학하였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49기로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1937년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때는 최전방에서 야전사령관으로 근무했다. 중일전쟁(지나사변)이 일어나자 소대장으로 참전하였고 당시 신문에서 이하영의 손자가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공훈을 쌓았다고 대서특필되었다. 또한 전장에서 일본 천황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내용으로 지은 그의 진중시(陣中詩)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군 최고훈장인 금치훈장을 받았다.1942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공병대에 배속되어 뉴기니섬에 파견되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만주·남양군도 등지에서 복무하였다. 광복 직전인 1945년 4월 사망한 아버지 이규원의 자작 작위는 습작하지 않았다.
광복 직전 일본군 육군 소좌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8월 패전, 뉴기니에서 귀국 후 일본군 생활을 자괴하는 뜻에서 3년간 낭인생활을 하였다.[2]
1933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3] 같은 해 4월, 육군사관학교(49기)에 입교하였다. 동기로는 채병덕이 있다. 예과 2년차에 병과가 결정되었고, 공병과를 선택하였다. 동기인 채병덕은 중포병과를 선택하였는데, 둘 다 기술병과를 지망한 이유는 선배인 26, 27기생(홍사익, 이응준, 김석원 등) 대부분이 보병과였기 때문에, 장래 한국에 군대가 창설될 경우 기술병과 출신이 부족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935년 3월 예과를 수료한 후, 4월부터 9월까지 아이치현 토요하시시에 있는 제3사단 공병대에서 근무하였다. 1937년 6월, 육사 49기 공병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견습사관으로 제3사단 공병대에 배속되었다.
1937년 8월 21일, 육군 공병 소위로 임관하였다.[4]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 전선에 파병되었다.[5] 1938년 3월 30일, 공병 중위로 진급하였다.[6] 1940년 겨울, 중국에서 귀환하였다. 1941년 3월, 대위로 진급하였다. 1942년, 제33회 론공행상에서 5등 욱일 6등의 금치훈장을 수여받았다.[7] 같은 해, 육군포병학교에 재학하였다.
선박 공병으로 전과하여, 선박 부대 참모로 남방 전선을 전전하였다.[2] 1942년 12월, 독립 공병 제4중대에 소속되었고, 1943년 7월부터 제17군 남해지대 소속 독립 공병 제15연대에서 복무하였다.[8] 독립 공병 제15연대 제3중대장으로 근무하였다. 소속 부대는 동부 뉴기니에 파병되어, 오웬스탠리 산맥을 넘어 포트모르즈비 작전 등에 투입되었다. 1943년 10월 전황 악화로 뉴기니 서부로 후퇴한 이후, 종전까지 남태평양 일대를 전전하였다. 1943년 12월 1일, 소좌로 진급하였다.[9] 1944년, 독립 공병 제15연대장 대리를 역임하였다. 마노크와리에서 다나카 타카오 중좌를 중심으로 한 갑기관이 편성되자, 제15연대에서 야나자와 고급군의와 함께 배속되었다. 임무를 마치고 마노크와리 지대 사령부의 한직에 붙었다. 종전 당시에는 독립 공병 제15연대 연대 부속이었다.[10]
전후, 조선 출신자로 조 부대가 만들어지고, 이가 그 부대의 지도자가 되었다. 1946년 5월 14일, 조 부대는 마노크와리 항에서 미군이 제공한 귀환 선박에 승선하여, 2일 후 할마헤라에 내렸다. 이때, 배웅하던 우에키에게 달려가 굳은 악수를 나누며 "우에키, 한국에 돌아가도 앞으로가 힘들 것이다. 서로 힘내자"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1946년 8월에 귀국하였다.[8]
2. 2. 해방 이후
1945년 귀국 후 은거 생활을 하며 뉘우치는 뜻을 표명했다. 1946년 초 이응준으로부터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입대 권유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거절하였다.[11]1960년 4·19 혁명 이후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여 군을 장악하고 민정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12] 백선엽 대장, 유재흥 중장에게 예편을 요구하였다.[23][24] 박정희 소장의 정군론을 듣고 쿠데타를 예견한 이종찬은 군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미국의 국가안보회의와 같은 기구를 설치한다고 발표하였다.[19] 이어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 등 군 수뇌부에 제헌절에 헌법 준수 선언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하였다.[19]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에 협력을 거부하였다.[25] 이후 주이탈리아 대사로 부임하였다가 1967년 사임하였다.
1968년 재향군인회 자문위원을, 1970년 코리아 엔지니어링 사장을, 1972년 한국-이탈리아 협회 회장을, 1973년 신한항업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 2월,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2기)에 당선되었으나 국회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고,[26] 여러 차례 사표를 제출하였다.[27] 같은 해 3월,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78년 1월 국회 안보문제 연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3월, 유럽 각국의 방위산업을 시찰하였다. 같은 해 12월, 제10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3기)에 재선되었다. 1979년 유신정우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김영삼의 제명(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에 반대하였다.[19] 1979년 3월, 성우회 회장[28]에 취임하였다.
전두환의 등장에도 비판적이었으며 12·12 사태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대해 지인에게 "군과 나라의 綱紀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다"고 한탄하였으나, 곧 수사를 받았고,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던 성우회가 해체되었다.[29]
1983년 2월 10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30]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졌고, 보국훈장 통일장이 추서되었다.[8]
2. 2. 1. 대한민국 군인 활동
1945년 귀국 후 은둔하다가 1949년 육사 정훈 1기로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다.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으나, 친일파 집안 출신으로 일본 군인이 되었다는 것 외에는 젊은 나이로 인해 특별한 처분을 받지 않았다.[11] 1948년 이시영 부통령의 권고로 한국 육군에 입대하였으며,[12] 계급은 대령(군번 15108번)이었다.1949년 6월 22일 국방부 제1국장으로 발탁되었고, 여순 사건으로 처벌 위기에 놓인 박정희를 구제했다.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을 때, 일시 부재리의 원칙과 박정희의 청렴함, 군인으로서의 우수성을 들어 변호하고 보호했다.[11] 1949년 8월 10일 국방부 제1국장에 임명되었고,[13] 11월에는 정훈국장에 임명되었다.[14] 1950년 4월, 국방부 병기행정본부장이 되었다.
1950년 6월 18일,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긴급 소집되었으나 지휘할 수 있는 부대가 부족했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한강 방어선으로 이동, 혼성 수도사단장으로 영등포를 방어했다(한강 전투).
1950년 7월 3일 북한군의 한강 도하로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자, 수도사단은 재편성되었으나 이종찬은 과로로 이준식에게 사단장직을 인계했다. 이후 채병덕의 지휘하에 제9사단 신편에 착수했다. 1950년 8월, 중앙훈련소 본부장,[16] 9월에는 제3사단장에 취임하여 형산강에서 북한군을 저지했다(경주 전투).
인천 상륙 작전과 낙동강 방어 작전 개시 후, 육군 본부는 이종찬을 준장으로 진급시키려 했으나, 이종찬은 국군이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후퇴한 것에 대해 사과하며 계급장을 반납하고 진급을 거절했다.[17] 결국 정일권 참모총장이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어 준장이 되었다.[17]
1950년 11월 30일, 국방부 병기행정본부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3월 17일, 육군종합학교 교장을 거쳐, 1951년 6월 소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후처리, 거창 사건, 부산 정치 파동 등의 재판에 몰두하며,[18] 정부, 한국군, 유엔군 간의 조정을 위해 노력했다.
1952년 1월 12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개헌 시도에 대해, 계엄령 선포에는 응했으나 병력 사용은 군의 정치 개입이라며 거절했다. 이승만은 "60만 대군 중에 내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은 당신뿐이다."라며 격노했다.[19] 5월 25일 비상 계엄령 선포 후, 신태영 국방부 장관과 원용덕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의 병력 동원 요구를 거절하고, 각 부대에 훈령 217호[22]를 발령하여 병력 이동을 막았다.[21]
미 육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은 이종찬에게 공관 출입 자제를 요청하고, 미군 헌병을 파견해 경비를 강화했다.[19] 이승만은 유재흥에게 이종찬 포살을 명했으나, 유재흥의 설득으로 취소되었다.[23]
1952년 7월, 참모총장직을 사임하고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유학했다. 1953년 7월, 육군대학교 총장에 임명되었다.
2. 2. 2. 한국 전쟁 전후
1950년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국 전쟁을 맞았고, 수도사단장과 제3사단장을 역임했다. 1950년 7월 수도사단장에 부임할 당시, 전임 수도사단장 김석원은 자신이 매우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물러나는 다소 껄끄러운 상황에서도 후임으로 부임하는 이종찬의 결연한 모습을 보며 크게 안심하며 부하들을 맡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1950년 9월 초 3사단장으로서 포항 부근의 형산강 지역을 맡아 방어하던 중 대대적인 인민군의 공세 앞에서 후퇴가 불가피하게 될 경우 자결한다는 결의로 분전, 끝내 형산강 일대를 지켜냈다. 1950년 10월 1일에는 3보병사단 전 병력을 이끌고 국군과 UN군 가운데 최초로 38선을 넘어서 북상하기도 했다. 그 뒤 제병협동본부(육군보병학교의 전신) 본부장을 거쳐 1951년 6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바로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1952년 5월 부산 정치 파동 때 대통령 이승만의 군부대 동원 명령을 거부하여 곧바로 해임되었다.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키려고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자동적으로 계엄사령관이 된 그에게 병력 출동을 지시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군의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려는 훈령을 내렸다. 이는 그가 후에 일각에서 '참군인'이라는 평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18일,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수도경비사령부는 제2연대, 제3연대, 제18연대를 편성하였으나, 6월 20일 부대 이동으로 제2연대가 홍천으로 이동하여 제6사단 예하가 되었고, 홍천에 주둔하고 있던 제8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 예하로 편입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25일 아침 긴급 소집되어 출근하였으나, 이미 제3연대는 제7사단(유재흥 준장)에 배속되어 포천으로 출동하였고, 제18연대는 휴가 및 외박 중인 병사들을 소집 중이었다. 홍천에서 이동 중이던 제8연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휘할 수 있는 부대가 적었다. 더욱이 25일 오후에는 제18연대도 제7사단에 배속되었고, 도착한 제8연대는 육군 본부 예비대가 되었으므로 이종찬이 지휘하는 부대가 없어졌다.[15]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한강 방어선으로 이동하였다. 이종찬은 혼성 수도사단장에 임명되어 영등포를 방어하였다(한강 전투).
1950년 7월 3일, 북한군이 한강을 도하하자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수도사단은 재편성되었으나 이종찬은 과로하여 사단장직을 이준식에게 인계하였다. 이종찬은 채병덕의 지휘하에 제9사단 신편에 착수하였다.
1950년 8월, 중앙훈련소 본부장에 임명되었다.[16]
1950년 9월, 제3사단장에 취임하였다. 형산강에서 북한군을 저지하였다(경주 전투). 반격에 나서 형산강에서 영덕으로 진격하는 중, 육군 본부는 일시적으로 이종찬을 준장으로 진급시켰으나, 이종찬은 계급장을 반납하고 진급을 거절하였다.[17] 사단장 보좌 겸 민정부장 신동우가 이유를 묻자, "지금 인천 상륙 작전과 낙동강 방어가 시작되었는데, 국군은 일계급 특진시킬 것이 아니라 일계급 강등해야 합니다. 국군이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후퇴하여, 이제 현실을 회복하고 국민 앞에 엄숙히 사과하며 일계급씩 강등해야 합니다."라고 답하였다.[17] 육군 본부는 일시적인 계급에 불만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식으로 진급시켰으나, 이종찬은 준장 계급장을 달지 않고 대령으로 남았다.[17] 최종적으로 정일권 참모총장과 강문봉 작전국장이 왔을 때 정일권이 몰래 작업모에 계급장을 달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준장이 되었다.[17] 진격 중, 청년들이 반역자를 잡아 현장에서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사단장의 엄명으로 모두 후송하여 법에 따라 처단하였다.[17] 또한 길가에 있는 시체는 매장하도록 명령하였고, 신동우가 이를 맡았다.[17]
1950년 11월 30일, 국방부 병기행정본부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3월 17일, 육군종합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6월, 소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후처리, 거창 사건, 서민호 사건, 부산 정치 파동 등이 잇달아 발생하여, 그 재판에 몰두하였다.[18] 또한 군과 정치의 접점인 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종찬은 정부, 한국군, 유엔군의 조정에 애썼다.
1952년 1월 12일,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간접선거제에서 직접선거제로 개정하기 위해(부산 정치 파동), 이종찬에게 계엄령 선포와 병력을 동원하여 반대 의원들의 활동을 봉쇄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종찬은 게릴라 활동을 간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계엄령 선포에는 응했으나, 병력 사용은 군의 정치 개입이라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60만 대군 중에 내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은 당신뿐이다."라고 격노하였다.[19]
5월 25일,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신태영 국방부 장관이 육군 본부에 1개 사단 병력을 계엄군으로 보내도록 요구하였으나, 이종찬과 이용문 작전국장, 김종면 정보국장 등은 전선 부대를 은닉할 수 없다며 요구를 거절하였다.[20] 또한 원용덕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은 밀양에 주둔하고 있는 1개 대대를 부산으로 보내도록 육군 본부에 요청하였다.[21] 계엄령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육군 본부는 군대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부산의 치안이 나쁘지 않다고 원용덕의 요청을 거절하고, 각 부대에 훈령 217호를 발령하여 병력 이동을 방지하였다.[22]
미 육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은 총장 공관에 미군 헌병을 파견하여 삼엄한 경비를 실시하는 한편, 이종찬에게 공관 출입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19] 이승만은 유재흥을 불러 이종찬을 포살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유재흥의 설득으로 취소되었다.[23]
1952년 7월, 참모총장직을 사임하고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유학하였다.
1953년 7월, 육군대학교 총장에 임명되었다.
2. 2. 3. 한국 전쟁 이후
1952년 7월 참모총장에서 해임되었으며, 이듬해 미국 육군참모대학교에 유학을 거쳐 1953년 육군대학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총장 재임 당시 육군대학교에서 1955년 컨닝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준장 2명과 중령 1명이 부정행위로 군복을 벗었다. 그 중 중령 1명은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 장군의 아들 이창선(예편 당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 2014년 12월 14일에 향년 94세로 별세.)이었다.[17] 제2공화국 당시 박정희 등의 쿠데타 기도를 사전에 감지하여 국무총리 장면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의 쿠데타 기도를 눈치챈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1960년 10월, 장면에게 박정희를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하면 쿠데타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1951년 6월, 소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18] 국민방위군 사건의 후처리, 거창 사건, 서민호 사건, 부산 정치 파동 등이 잇달아 발생하여, 그 재판에 몰두하였다.[18] 또한 군과 정치의 접점인 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종찬은 정부, 한국군, 유엔군의 조정에 애썼다.
1952년 1월 12일,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간접선거제에서 직접선거제로 개정하기 위해(부산 정치 파동) 이종찬에게 계엄령 선포와 병력을 동원하여 반대 의원들의 활동을 봉쇄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종찬은 게릴라 활동을 간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계엄령 선포에는 응했으나, 병력 사용은 군의 정치 개입이라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60만 대군 중에 내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은 당신뿐이다."라고 격노하였다.[19]
5월 25일,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신태영 국방부 장관이 육군 본부에 1개 사단 병력을 계엄군으로 보내도록 요구하였으나, 이종찬과 이용문 작전국장, 김종면 정보국장 등은 전선 부대를 은닉할 수 없다며 요구를 거절하였다.[20] 또한 원용덕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은 밀양에 주둔하고 있는 1개 대대를 부산으로 보내도록 육군 본부에 요청하였다.[21] 계엄령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육군 본부는 군대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부산의 치안이 나쁘지 않다고 원용덕의 요청을 거절하고, 각 부대에 훈령 217호[22]를 발령하여 병력 이동을 방지하였다.[21]
미 육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은 총장 공관에 미군 헌병을 파견하여 삼엄한 경비를 실시하는 한편, 이종찬에게 공관 출입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19] 이승만은 유재흥을 불러 이종찬을 포살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유재흥의 설득으로 취소되었다.[23]
1952년 7월, 참모총장직을 사임하고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유학하였다.
1953년 7월, 육군대학교 총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군을 장악하여 민정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12] 백선엽 대장, 유재흥 중장에게 예편을 요구하였다.[23][24]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군부가 들끓던 시절, 박정희 소장의 정군론을 듣고 쿠데타를 예견한 이종찬은 군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미국의 국가안보회의와 같은 기구를 설치한다고 발표하였다.[19] 이어 육해공의 각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 등 군 수뇌부에 제헌절에 헌법 준수 선언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하였다.[19]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에 협력을 거부하였다.[25]
2. 3. 생애 후반
1980년 국회가 해산되자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구락부 회장을 역임했다. 유한회사 코리아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고, 이후 재향군인회 고문에 위촉되었으며, 한이협회장, 한일불교협의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평소 군인의 길만을 걷지 못하고 정치에 입문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고 한다.2. 3. 1. 제2공화국 당시
1960년 4·19 혁명 이후 허정 과도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을 맡았다. 국방부 장관 재임 시, 3·15 부정선거에 동조한 군인들을 숙정하고,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이 헌법 준수 선서식을 하도록 하는 등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데 힘썼다.[12] 백선엽 대장, 유재흥 중장에게 예편을 요구하였다.[23][24] 민정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군을 장악하였다.박정희 소장의 정군론을 듣고 쿠데타를 예견한 이종찬은 군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미국의 국가안보회의와 같은 기구를 설치한다고 발표하였다.[19] 이어 육군, 해군, 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 등 군 수뇌부에 제헌절에 헌법 준수 선언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하였다.[19]
2. 3. 2. 3공, 4공 시절
1961년 7월부터 1967년 9월까지 주이탈리아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로 근무했다. 이는 군사 정변 이후 군정을 비판하다가 제3공화국을 지지한 결과였다. 1976년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9·10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1979년 유정회로 당적을 옮겼다.[26][27]1980년 국회가 해산되자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구락부 회장을 역임했다. 유한회사 코리아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고, 이후 재향군인회 고문에 위촉되었으며, 한이협회장, 한일불교협의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평소 군인의 길만을 걷지 못하고 정치에 입문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2. 4. 최후
1983년 2월 10일에 사망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통장에는 260000KRW이 있었고, 당시 그가 입고 있던 옷의 호주머니에는 2000KRW이 남아있었다.2. 5. 사후
이종찬의 장례식은 육군장으로 엄수되어 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보국훈장 통일장이 추서되었다.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을 발표하면서 이종찬을 일본군 영관급 장교 경력을 가진 인물로 포함시켰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또한 이종찬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시켰다.
3. 가족 관계
4. 학력
- 경성사범학교 부설 보통학교 졸업
-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 일본 육군사관학교 49기
- 일본 육군포병학교 졸업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특7기(1948년)
- 대한민국 국방부 보병학교 졸업(1949년)
-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1951년)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학사 졸업(1956년)
5. 평가와 비판
이종찬은 대통령 이승만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 유명해졌으며, 군 후배들에게 높은 신망을 받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일부 학자나 정치인들은 과거사 정리에 신중해야 하며, 친일파의 후손이거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일괄적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펼칠 때 이종찬을 인용하기도 한다.[38]
원칙을 중시하는 군인다운 군인이었던 이종찬은 성실하고 불의를 매우 싫어하는 장군이었다.[31] 골프와 등산이 취미였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불교중앙문화원 부직을 역임하기도 했다.[32] 그는 젊은 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하여 항상 신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한번 말을 시작하면 수 시간 동안 담화를 나눌 정도로 열정적이었다.[19]
이승만은 자신의 명령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종찬을 이시영의 사촌 동생이라며 주한미군에 거짓으로 고발하고 해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실제로는 이종찬의 할아버지 이하영이 이시영 7형제와 20촌간으로 먼 친척이었다.
당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정규 장교가 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지만, 이종찬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갑기관(甲機関) 임무 수행 중, 이종찬은 비전투원 중 젊은 여성들을 군에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자 격노하여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군의 발안자 성명을 대라. 나는 발안자를 사살하더라도 이 명령을 철회시키겠다. 그리고 나는 깨끗이 자결하겠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생각이 틀렸는가? 나는 제국군인으로서 결코 절개를 굽히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즉시 여성들을 이동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남방에서 이종찬과 고난을 함께한 당번병 기제와 통보에 따르면,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친절한 대장이었고, 상부에는 가시 돋친 엄격한 의견을 서슴없이 말하는 강직한 군인이었다. 또한 식량이 부족할 때에도 결코 병사들보다 더 많이 먹는 등의 행위는 하지 않았고, 공평하게 고난을 함께하는 고결한 상관이었다고 한다.
김석원은 자신의 저서 『노병의 한』에서 이종찬에 대해 “풍부한 실전 경험과 탁월한 지휘 능력, 그리고 애국애족 정신이 왕성하여 제3사단을 통솔하는 데 손색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부산 정치적 격변에 대해서는 “나는 불의의 사건에 대처하여 자신의 신념을 관철한 이 장군의 용기 있는 행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또한 어려운 조건 속에서 ‘방위군 사건’ 등의 큰 사건을 교묘하게 처리한 이 장군은 은퇴했지만, 그의 군인다운 ‘기개’는 발전 단계에 있던 국군에 훌륭한 귀감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라고 적었다.
미군 군사 고문은 이종찬이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미군에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고, 영어를 못 한다고 평가했다.
1950년 11월 2일, 제3사단 전임 고문관 롤린스 S. 에머리치 중령은 이종찬의 사단장 해임을 제안하는 문서를 작성했다.[33] 이종찬이 제3사단장으로 부임한 이후 만성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호흡기 감염으로 숙소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사단을 지휘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 이유였다.[33] 에머리치 중령은 이종찬을 진지하고 양심적이며 지적이고 충실한 한국군 장교이지만, 사단장직을 수행하기에는 공격성과 체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의 지식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참모 또는 행정직에 있을 경우 한국군에 큰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33]
2008년4월 28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군 부문에 이종찬을 포함시켰다.[34]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보고서에서 “1937년에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공병 소위로 중일전쟁에 참전했고, 1942년부터는 남태평양 뉴기니아에서 패전까지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 현역 장교로 복무하면서 침략 전쟁에 참여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1941년에 훈육등 서보장(勳六等瑞寶章), 1942년에는 특별한 무훈이 있는 자에게 수여되는 금치훈장(金鵄勳章)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제2조 제10호 및 제19호에 해당한다고 하여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6. 이종찬을 연기한 배우
7.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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